키스와 죽음사이 .................
Kissing Or Dying
Killing Or Desertting
키스하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놓아주거나
* K O D 26 진실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
"....."
정민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시간이 어두워진 지가 한참이 지났는데 현중이 들어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였다. 아까 술집에서 영생, 규종과 헤어진 뒤 현중의 핸드폰을 들고 왔던 정민은 울리지 않는 현중의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자신의 손으로 옮겼다.
붕대가 엉성하게 매여져 있는 자신의 손을 본 정민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에이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내가 만약 내일 죽는다면?', '세계가 멸망해버린다면?','내가 여자였다면?' 등의 생각은 몇 번이고 해봤던 정민이였다.
하지만 그는 단 한번이라도 '내가 에이즈에 걸렸다면?'이라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암담하고, 그래서 더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 사실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밝혀야 하는 건지, 만약 밝힌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사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몰랐다.
에이즈라는 건 전염성이 있는 병이었다. 현대의학이 그렇게 발달했다고 하는 지금도 그 병의 예방제 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그런 무서운 병이었다. 점점 몸의 면역력이 떨어져서 결핍한 상태에 이르고 자연스레 죽음으로 이어지는.
그 병에 걸렸다는 건, 몇 일이, 몇 개월이, 몇 년이 남았을지 모르는 '시한부 선고'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다간 정민의 실수 하나에 그 시한부 선고가 현중에게로 까지 넘어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장 위험한 인물은 현중이었다.
현중과 정민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집에서 보내고, 서로의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고, 타액이 오고가는 진한 키스를 하며, 정액과 피가 섞고 섞이는 섹스를 나누는 사이였으니까.
말을 해줘야 한다고는 생각을 했다. 이 힘든 현실을 혼자 안고 살아 갈 용기도 없지만, 이대로 간다면 현중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에게 먼저 이별 선고를 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헤어질지도 모르게 악화 되어버린 둘의 관계 때문에 정민이 숨겨왔던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게, 두 사람의 관계를 진정으로 회복 시킬 수가 있는 일인지.
지금껏 약점이 잡히는 바람에 다른 남자와 질리도록 몸을 섞으면서 현중의 손길을 잊어버리고 그 남자의 손길에 몸이 익숙해져버렸던 과정.
그리고 에이즈라는 결말.
.
.
.
.
'진실'은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게 분명했다.
.
"난 정말이지 두 사람 다 이해가 안 가."
"마찬가지야. 도대체....현중이나 정민이나 지금 확실히 머리가 돈 것 같아."
"....뭘 알아야지 도와주던가 하지."
"어째 이 시점부터는 우리가 연관 짓는다고 해서 바뀌지가 않을 것 같아. 솔직히 지금까지 싸웠던 건, 서로한테 감정이 상했더라던가 오해할만한 상황이 생겨서였지만....지금 이 상황은 뭐랄까.... 서로..싫어졌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정민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무슨 말?"
"만지는 게 싫다고."
"....이젠 현중이가 닿는 것만으로도 싫겠지. 사람 싫어지는 거 한 순간이야."
"정민이가 그럴리가 없어. 형, 정민이 얼마나 착한 앤지 알지? 아무리 싫어져도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할 애는 아냐. 분명 다른 일이 있는 건데...."
"......."
영생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려 규종을 빤히 바라봤다. 규종은 정민이 나가고 남은 출구를 아직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너 말인데..."
"....응?"
"너 정민이 일에는...정말 열 내는 거 알아?"
"어? 당연한 거 아냐, 친구인데."
"너 다른 친구 일에는 안 그러잖아."
"...내가 그랬나?"
"응, 진짜 심해."
".....근데 뭐...형은 내가 친구한테 그럴 수도 있지, 그게 왜?"
"....너 나한텐 안 그러잖아."
영생의 말에 규종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영생은 그런 규종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시선을 거두었다.
"뭐...내가 형한테도 정민이만큼 신경써줬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야?"
"......."
"아,푸하...허영생,완전 웃긴다. 중학생이야? 아니, 초등학생? 어디서 그런 말이 있냐."
"여기 있다,왜."
"그럼 지금까지 내가 정민이 좋아하고 걱정하고 이런 거 되게 신경 쓰였겠다? 어?"
"응. 많이 신경 쓰였어."
장난스레 말을 던진 규종과는 달리 너무도 진지한 영생의 표정과 얼굴에 규종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영생이 자신에게 무슨 장난을 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에...왜...갑자기 진지모드...."
"진심이야."
".......형.."
"......."
규종이 믿기지 못하겠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 표정은 마치 설마-하는 생각을 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게 맞다면 믿기 싫은 듯 불쾌한 표정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규종은 그런 생각을 안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영생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런 규종의 표정을 본 영생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장난이야,임마.... 바보같이 왜 그런 표정 하고 있냐? "
"어..어어! 장난이야? 어?! 아씨!! 그런 장난 치지마! 놀랬잖아! 와...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어디서 연기 배웠어? 표정 지대로 리얼하던데?"
"연기는 무슨... 니 표정이야말로 더 리얼했어."
"아,진짜~ 장난이라도 그런 장난은 치지마. 나 진짜 깜짝 놀랬단 말야."
"에이,술도 김현중이 다 마셨겠다. 나가자. 바람 쐬고 싶어."
영생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며 밖으로 나왔고, 규종은 뒤늦게 영생을 따라 나섰다. 앞장 서서 걷고 있던 영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이!어이! 내가 돈 내라고?"
"니가 내, 다음에 살게."
"안 사기만 해봐라!"
티를 내지 않으려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 영생이었지만, 표정은 쉽게 숨길 수가 없었다. 앞장 서서 걷고 있던 영생은 또 금새 마음이 약해져버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이렇게 규종의 표정 하나에, 말 한 마디에 쉽게 울어버리고 마는 자신은 한심해보이기 짝이 없었다. 규종도 이런 자신을 알면 분명히 치가 떨려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흘러내릴 것만 같은 눈물을 참아내기 힘들었던 건지, 영생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소리쳤다.
"야,김규종!! 여기서부터 집까지 달리기 시합하자."
"추워! 무슨 달리기야!"
"지는 사람이 3만원 내는 거다. 출발!!"
영생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면서 뛰기 시작했다. 뒤이어 규종이 빠른 속도로 쫓아왔지만, 영생은 마음을 굳게 먹고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눈물을, 마음을 규종에게 감추기 위해서.
.
새벽 어두운 시각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현중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아직 불이 켜져있는 걸 보고 놀란 듯 거실로 다가갔다.
"...기다렸어?"
"아니,그냥...TV보면서 있었어."
"그래..."
두 사람의 어색한 대화가 끊겨버렸고 현중은 시선을 어디 둬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를 쳐다보다가 정민의 손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그건....좀 괜찮냐?"
"....뭐?"
"손.."
"아,괜찮아.."
"......."
현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민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정민은 현중을 잡아서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민은 아직 켜져있는 TV의 전원을 끄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갔다. 현중이 안전하게 들어온 것도 봤으니 마음 놓고 잠을 자도 됄 것 같았다.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온 정민은 이불에 들어갔다. 머지 않아 현중이 정민을 따라 방으로 들어왔고, 그가 잠시 주저하는 듯 하더니 정민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자연스레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언제부터인지, 어디서부터 시작돼었는지 모를 당연해져버린 거리.
섭섭하기 짝이 없었고, 슬프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정민은 현중에게 그런 걸 말할 처지가 돼지 못했다. 그 '거리'를 만들어 버린 건 분명히 자신일테니까 말이다. 만약 이 상황이 계속해서 지속된다면 언젠가 이 거리는 하루하루 더 멀어져 두 사람이 생판 남이 될 사이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건 정민에게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
"......"
아까 영생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현중이 몹시 힘들고 하고 있다는 지금의 상태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간다면 현중이 다른 사람에게 갈 지도 모른다는 말.
그러고보니 꽤나 충격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새 머리에 잊혀져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영운과 길거리를 걷다가 보고 말았던 현중을 말이다. 옆에 있던 건, 놀랍게도 현중이 연주하는 클럽을 매번 찾아온다며 한 번 봤었던 형준이었다.
혹시 현중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이라고 상상을 해봐도 도저히 형준은 떠올린 적이 없었던 정민이였다. 왜냐하면, 그는 형준 앞에서 노골적으로 그를 싫어하는 티를 냈으니까 말이다. 너무 못대해주는 거에 정민까지 민망하게 만들었었는데, 두 사람이 정민도 모르는 사이 얼마나 친해진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민은 갑자기 형준이 현중에게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졌다. 그 때, 정민이 보았던 건 그저 형준이 현중에게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는 모습이었다. 현중이 한 행동도 아니였고, 현중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중의 마음은 알 수 있는 게 아니였다. 정민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형."
"....?"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김형준...기억하지?"
정민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현중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정민이 형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크게 잘못한 거라도 들킨 듯 현중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
"김형준씨 말이야. 형이랑 이름 비슷했잖아, 내가...저번에 한 번 소개시켜줬던 사람."
".......어...."
"그 사람...요즘에도 연주 있을 때마다 보러와?"
"어...."
"혹시..내가 소개시켜 준 다음에...두 사람 만난 적 있어?"
"......."
정민의 불안한 눈동자가 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현중은 아까부터 정민의 눈동자에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떨고 있는, 불안해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들켜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현중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아니...그 뒤론..한 번도 안 만났어."
".....그래? 아..그럼 됐어-"
정민이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현중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을 숨긴다는 거면, 정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썸씽이 오고 가고 있다는 말이였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정민의 머릿 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현중에게 생겨버렸다면, 지금은 당연히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자리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의 주인은 정민이 정하는 게 아니였다. 오로지 현중의 마음이 정하는 거였다.
지금 이 상태로 간다면,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빼앗겨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정민이였다.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는 남자인 현중을 자신에게서 멀게 한 건 정민, 자신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정민은 말 하기가 힘겨운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형.."
"...어?"
"형이 그랬잖아, 헤어지고 싶을 땐..말 하라고."
"......."
"그거 형한테도 해당되는 거 맞지?"
"...뭐?"
"진짜 헤어지고 싶을 때, 더 이상 우리 사이에 사랑이란 감정은 남아 있지 않을 때, 서로 따로 걸어가는 게 서로에게 더 좋을 때...."
"......."
"그 때가 되면 형은 주저하지 말고 헤어지자고 얘기해줬으면 좋겠어. 그럼 난 진짜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형 다른 사람이랑 잘 되게 빌어줄 수 있을 것 같아.."
"갑자기....그런 얘길 왜 하는데..?"
"그냥...그런 생각이 들어서 해 본 거야."
그렇게 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아서.

















